제주 용담동 유적은 남해안을 마주 보는 제주도 북부 한가운데에, 해안에서부터 약 500m가량 떨어진 완만한 평지 상에 있다.
이 일대는 속칭 먹돌생이라 하는 곳으로, 완만하게 펼쳐진 대지가 반경 2km 이상 이어져 있는 곳이다.
용담동 유적은 1984년에 용담동 주택공사 현장에서 합 구식(合口式) 독무덤 1기가 발견됨으로써 발굴이 시작된 유적이다.
묘역은 그 한가운데 동서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석렬(石列)을 경계로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나뉘었다.
남쪽 구역에서는 고인돌 하부구조처럼 보이는 석곽묘(石槨墓) 3기, 북쪽 구역에서는 6기의 옹관(甕棺)과 1기의 다소 폭이 좁은 장방형 석곽묘가 확인되었다. 한 곳에 위치한 유적이지만, 남북 두 구역으로 나뉜 용담동 유적은 그 형성 시기가 서로 같지 않다.
남쪽 구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류는 제주도 공렬토기(孔列土器) 말기 단계로, 기원전 200년에서 기원직전까지 사용한 토기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제주도 북쪽 구역은 토기뿐 아니라 다량의 철제 유물과 유리구슬 제품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제주도 탐라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분묘 구역으로, 대략 기원후 1,2세기경으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보통 이 시기의 차이는 공렬토기 사용집단의 무덤이 있는 곳에 새로운 철기 소유 집단이 앞 시기의 묘역과 일단 석렬로써 경계를 구획한 다음, 그에 잇대어 공동묘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용담동 유적은 기원전후 당대 선주민 사회(先住民社會) 변화 과정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남쪽 묘역은 약 40m2 가량의 넓이에 3기의 석곽묘가 위치하고 있다. 모두 북쪽 묘역과의 경계 석렬에 바로 붙어 배치되어 있다.
세 석곽묘 중 가장 큰 1호 석곽묘를 동쪽으로 해서 차례로 서쪽에 나머지 두 석곽묘가 붙어있는 형태이다. 이 구역의 출토 유물은 모두 석곽의 벽석(壁石)틀과 바닥 면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3호 무덤에서는 피장자(被葬者)가 어린아이임을 추측케 해주는 인골의 작은 파편들이 수습되기도 했다.
북쪽 구역은 광범위한 적석군(積石群)을 이루며 일정한 원칙 없이 이곳저곳에 놓여있으며, 석곽묘 1기만 다소 동쪽에 치우쳐 있다.
남쪽 구역의 유적과 마찬가지로 할석(割石-깬돌)을 깔아 놓아 묘역을 확보하였는데 대체로 전체가 동서로 긴 장방형을 하고 있다.
발굴 착수 당시 이미 묘역의 북쪽은 밭 경계로 끊어져 있어 묘역의 원래 범위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확인된 묘역만을 보면 동서 길이 15.6m, 남북 폭 3.65m로 총면적은 대략 60제곱미터가 되어, n 남쪽 묘역의 두 배 가까이 된다.
옹관은 모두 작은 할석으로 돌려 있으면서 두개의 크고 작은 적갈색 토기 항아리가 맞물린 합 구식(合口式), 한 개의 항아리를 비스듬히, 또는 수직으로 묻은 단 옹식(單甕式)이 있다.
용담동 북쪽의 적석묘역 석곽묘와 독무덤의 개별적인 특징을 따져보면 한반도에서는 그 동일한 예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유구(遺構)의 구성과 복합 상태는 같은 예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묘제(墓制)의 복합성은 원삼 국시대 제주도 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쪽 묘역에서 출토된 철기는 주조철기가 대부분이며 그 양식은 한식(漢式) 철기 계열이다.
이곳에서는 장검 2점과 단검 1점을 비롯한 철창, 철부 등의 다량의 철제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출제 부장품들은 지금까지 남한과 일본 사이에 존재하던 철기 전래의 공백을 메워주는 한편, 그 시기 한반도 남부와 제주 사이에 교역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자료로 제시되고 있다. 게다가 한반도 남부(특히 경상도 지방)의 출토 사례와 함께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철기의 발전 과정이 한국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져 일본의 구주(九州) 지방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다량의 철제 부장품의 출토는 무덤의 주인이 비교적 우월한 지위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말해준다.
덧붙여 철제 농기구가 출토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농기구를 통한 농업 생산력보다는 무기를 통한 무력적 권위를 형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보다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한 이 용담동의 철기 집단은 탐라국 형성 지점에서 제주의 지배세력으로 떠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