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파두리 『遺物槪觀』
삼별초 세력은 원종 12년(1271) 5월 진도에서 항거하다가 몽고와 고려 연합군에 의해 밀려났다. 그 결과 세력의 일부가 제주로 거점을 옮기게 되었고, 여기에서 이후 3년 동안 고려 최후의 반몽 세력으로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제주 입거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적장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로 들어갔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남해도에 근거하고 있던 유존혁(劉存奕)은 삼별초 세력의 제주 입거 소식을 듣고 선단 80여척을 끌고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본다면 제주도 삼별초 세력은 진도로부터 탈출한 세력이 중심을 이루면서 아울러 여타 남해 연안 도서로부터 이동한 세력, 그리고 이전 제주도에 있던 삼별초 세력 등이 합류하여 항전 활동을 재정비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주도로 거점을 옮긴 삼별초 세력이 항전의 중심으로 삼은 곳이 바로 항파두리성이다. 삼별초 세력은 김통정 장군의 지휘 아래 항전을 대비,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내성은 둘레 700m 정도의 사각형의 석성(石城)이고, 그 바깥의 언덕과 계곡을 따라 약 15리에 걸쳐 최대한 자연 지형을 이용해 타원형의 토성(土城)을 축조했다.
성내에는 백성들을 살게 했고 석축(石築)한 내성에는 관아를 두었다. 이 지대는 높고 동서로 하천이 있어서 천연적 요새를 이루며, 성 밑에 수량이 풍부하여 언제나 흐르는 구시 물과 옹달샘이 있었으므로 이곳에 자리 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항파두리성은 동서남북에 각각 문이 있었다. 성의 길이가 6km나 되는 제법 큰 규모의 성인데다, 성 상단 높이는 4~5m, 성 너비는 3~4m로 계단 현이 단을 두어 외측으로 방어가 되게 하였다. 성의 구조는 하부 틈에 잡석을 깔고 2층에는 진흙 다짐, 3층에는 잡석과 진흙, 그리고 강화 다짐과 진흙 다짐을 한 후 잔디를 입힘으로써 성위에서 군사들과 군마들이 다녀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도록 과학적인 공법을 사용하였다.
토성이 완성된 후에는 민가에서 재를 거두어 성 위에 항상 뿌려두었다가 적의 침공이 있을 때는 말을 그 위로 달리게 하였는데, 말꼬리에 대비를 달았으므로 회진(灰塵)이 충천하여 연막을 편 것처럼 성의 모습이 감추어졌다고 전한다. 이곳을 중심으로 이후 그들은 3년간 마지막 반(反)몽고 세력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제주도에 자리 잡은 초기부터 삼별초가 강화도나 진도에서처럼 눈에 띄는 활동을전개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주한 그 해 하반
기까지의 제주 삼별초군은 본토까지의 군사 활동은 적극적으로 펼치지 못하고 남해 주변 도서(島嶼)만 확보하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근 1년이 지난 원종 13년(1272) 삼별초군은 다시금 본토 연해지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초기 전라도 해안 지역을 공략하던 삼별초 세력은 동년 6월이 넘어서면서부터는 경기․충청 지역의 조운로를 위협하는 한편, 지방 관아의 수령과 몽고 장병을 납치하는 등 나름대로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치게 된다.
제주 거점의 삼별초는 전라도 연안부터 개경에 가까운 서해 중부 연안, 그리고 몽고군의 주둔지인 경상도 연안 지역으로 점차 그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들의 활동은 고려 조정을 긴장시킬 정도는 되었지만 본토와 멀리 떨어진 제주를 거점으로 한 해상 활동에 근거하고 있다는 한계로 인해 산발적인 위협 공격의 수준을 넘지는 못했다.
제주 삼별초군의 활동이 개경에 알려지게 되자 일단 고려 조정에서는 그들을 회유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고려와 몽고는 제주 공격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종 14년(1273) 4월 9일 나주의 반남현에서 고려와 몽고 연합군은 제주로 출정을 하게 된다. 함선 160여척에 수륙군 1만여 명을 동원한 여몽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에 삼별초는 무력하게 무너지고 만다.
풍랑과 삼별초군의 저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연합군은 4월 28일 삼별초의 최후거점인 항파두리성에 입성하여 항복을 받고 진압을 공식화한다. 측근들과 함께 한라산 기슭으로 피신했던 김통정 역시 ‘붉은오름’에서의 최후의 전투 이후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자진, 이로써 40여 년을 이끌어온 고려 내의 대몽항쟁은 종식되었다.
현재 항파두리 유적지에는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일부 남아있으며, 돌쩌귀, 기와 등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밖의 당시 시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197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결과 세워진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 등의 시설이 남아있을 뿐이다.
오현단(五賢壇)
제주도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현단은 제주도 제주시 이도 1동 1421번지에 위치해 있다. 오현단은 고종 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서원(橘林書院)이 헐린 후, 고종 29년(1892) 제주 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祭壇)이다.
귤림서원은 선조 11년(1578)에 조인후(趙仁後) 판관이 중종 16년(1521) 10월에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된 충암(沖庵)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충암묘(沖庵廟)를 지은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현종 6년(1665) 최진남(崔鎭南) 판관이 충암 묘를 이곳으로 옮겨 사(祠)라 하고, 이미 효종 10년(1659) 제주 김진용(金晉鎔)의 건의에 의해 이 회(李遼)(李遼) 목사가 이곳에 세운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 하였다..
오현은 김정을 비롯하여, 선조 34년(1601) 소덕유(蘇德裕)·길운절(吉雲節) 역모 사건 때에 안무 어사(安撫御史)로(安撫御史) 제주에 파견되었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1669년에 배향), 대정현에 유배되었던 동계(桐溪) 정온(鄭蘊 : 1669년에 배향)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 1695년에 배향), 제주목사를 역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 1682년에 배향)를 말한다.
따라서 오현은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안무어사, 혹은 목사로 왔던 사람들이다.
지금도 단내에는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이 있는데 각자 33∼35cm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유적 내에는 또한 ‘증주벽립(曾朱壁立)’의 마애명과 귤림서원묘정비(橘林書院廟庭碑), 향현사유허비(鄕賢祠遺墟碑) 등이 세워져 있다.
그 중 마애명 ‘증주벽립’은 채동건(蔡東健) 목사 때, 홍경섭(洪敬燮) 판관이 귤림서원(지금의 오현단) 서쪽 벼랑, 속칭 ‘병풍바위’에 새겨놓은 네 개의 큰 글자를 말한다. 원래 이 증주벽립은 송시열의 글씨로 성균관 북쪽 벼랑에 새겨져 있었는데, 제주출신 변성우(邊聖遇)가 정조 10년(1786) 성균관 직강(直講)으로 있을 때 탁본하여 온 것을 오현의 한 사람인 우암 송시열 선생을 기리는 뜻에서 철종 7년(1856)에 음각해 놓은 것이다. 그 의미는 “증자(曾子)와 주자(朱子)가 벽(壁)에 서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뜻이다.
오현단은 개관글에서 밝혔듯 제주도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파견되었던 사람들 가운데 다섯명을 가려뽑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조선 시대 문신이었던 김정, 김상헌 정온, 송인수, 송시열 등이 그 다섯명인데 이글에서는 다섯 인물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겠다.
충암 김정 (沖庵 金淨,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보은 출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원충(元食), 호는 충암(食菴)․고봉(孤峯),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1507년 증광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자리를 거치다가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의견이 분분했는데, 결국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처벌을 주장한 자들이 파직당했다. 이는 곧 중앙 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인종 1년(1545) 복관되었고, 인조 24년(1646)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존재로서, 그들의 세력 기반을 굳히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적극 주장하였고,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僞勳削除) 등을 추진하였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청음 김상헌 (淸陰 金尙憲, 1570-165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서울 출신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선조 29년(1596) 전쟁 중에 실시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는데, 그해 제주도에서 반란이 발생하자 진상 조사와 수령들의 근무상황을 점검하라는 임무를 띠고 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왕에게 결과를 보고하고, 고산찰방(高山察訪)과 경성도호부판관(鏡城都護府判官)을 지냈다.
광해군 즉위년(1608)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광해군 4년(1611)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 배척에 앞장선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했다가 광주부사로 좌천되었다. 1613년 칠서지옥이 발생,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그 집안과의 혼인관계로 인해 파직되자 안동군 풍산으로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 세력의 보합위주정치(保合爲主政治)에 반대, 시비(是非)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해 서인 청서파(淸西派)의 영수가 되었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李貴)와 의견 충돌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 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다. 이듬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 풀려 귀국하였다. 1645년 특별히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사에 들어갔다.
효종이 즉위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大老)’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김육(金堉)이 추진하던 대동법에는 반대하고 김집(金集) 등 서인계 산림(山林)의 등용을 권고하였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현종 2년(1661) 효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야인담록(野人談錄)》《남사록(南錄)》등이 있고, 후인들에 의해 문집 《청음집》이 간행되었다.
동계 정온 (桐溪 鄭蘊, 1569-164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선조 39년(1601)에 진사가 되고, 광해군 2년(1610)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임해군옥사에 대해 전은설(全恩說)을 주장했고,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격렬한 상소를 올려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격분하여 이원익(李元翼) 등의 반대에도 유배를 명하여 이어서 제주도에서 10년간 생활하면서, 중국 옛 성현들의 명언을 모은 ≪덕변록(德辨錄)≫을 짓기도 했다.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지목되어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내세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항복이 결정되자 칼로 자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 들어가 조[粟]를 심어 생계를 자급하다가 죽었고, 이후 숙종 때 그의 절의를 높이 평가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의 현실대응 자세는 조식(曺植)에서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강개한 기질을 이어받아 매사에 과격한 자세를 견지하였다. 허목(許穆)·조경(趙絅) 등 기호남인(畿湖南人)과도 깊은 관계를 가져 이황-정구-허목으로 이어지는 기호남인학통 수립에도 큰 구실을 하였다.
규암 송인수 (圭庵 宋麟壽, 1487-1547)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미수(眉馬)․태수(台馬), 호는 규암(圭菴),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중종 16년(1521)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 집권세력인 김안로 일파와 대립하였고, 그로 인해 미움을 받아아 1534년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이 때 그는 병을 칭탁하고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를 빌미로 김안로 일파에게 탄핵을 받아 사천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풀려나 이듬해 예조참의가 되고 대사성을 겸임하면서 후학에게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는데, 윤원형(尹元衡) ․ 이기(李咬)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에 부임하여 형옥 사건을 제때에 처리하고 교화에 힘써 풍속을 바로잡았으며, 교육을 진흥시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154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와 다시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을 탄핵하였다.
그런데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한성부좌윤에 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에 은거하던 중 사사(賜死)되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성리학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문집에 ≪규암집(圭庵集)≫이 있다.
우암 송시열 (尤庵 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우재(尤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 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효종)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좌절감을 느껴 낙향, 10여 년 간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그에게도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효종 4년(1653)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사림의 여론이나 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어 숙종 1년(1675)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垢)․거제 등지로 옮겨졌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그를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었다.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사되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과격한 성격 탓에 정적(政敵)을 많이 가졌으나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저서에《송자대전(宋子大全)》《우암집(尤庵集)》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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