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탐라국의 성립
전설에 의하면 고을나·양을나·부을나 3명의 신인이 모흥혈에서 용출하여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책인 “후한서”와 “신당서”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다고 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의 사회는 3 성씨족의 공동 연맹 체제를 보인다.
② 백제에 복속
탐라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백제와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쳤으며 백제왕은 사신에게 좌평이란 높은 관등을 수여하였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탐라가 공부를 이행하지 않으므로 동성왕이 직접 탐라 정벌에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탐라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며 공부할 것을 약속하였다.
※ 고구려와는 정식으로 국교는 없었으나 백제에 복속될 때까지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이 이루어 졌다.
③ 신라에 입조
탐라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 음률(徒冬音律)에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탐라는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에 신라의 경략을 받은 뒤로는 신라 일변도의 국교가 이루어졌다.
※ 한편 중국과의 관계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계기로 661년 8월에 탐라왕 유리도라가 당에 사신을 보내었고, 또 일본과는 661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 사신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하였다가 귀국할 때 탐라의 왕자 아파기 등 9명이 이들을 따라서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으며,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의 왔다는 기록도 있다.
④ 고려에 입조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38년 12월에는 탐라 국주 고 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입조 하였다. 이때 고려는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의 번국(蕃國)으로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가다가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인 1개의 군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으로 된 뒤로는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에 의하여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되어 실질적인 면에서 탐라국의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
⑤ 원의 지배
고려 원종 14년 몽고군이 제주를 침범해 삼별초 진압한 후, 탐라 총관부에 의해 제주는 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원이 쇠퇴하자 고려 공민왕 23년 최영 장군이 제주로 내려와 몽고군을 토벌하였다.
⑦ 조선의 제주 관할
조선 태종 3년 성주와 왕자의 칭호가 폐지되고 조선조 중앙에서 실질적인 행정력을 가진 목사를 두어 제주를 관할하였다. 제주는 주로 조선조의 정객과 학자들의 유배지로 이용되었는데, 이러한 정객과 학자들의 훈학은 제주에 유학의 보급과 문화에 기여되었다.
※ “탐라국은 고려에 입조하는 45대 고 자견 왕까지 왕국을 유지하였다. 백제나 신라에 복속하였다는 의미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백제와 신라 쪽 관점에서 쓰였기 때문이고, 사실은 탐라국은 복속된 것이 아니라 백제나 신라 같은 강국으로부터 왕국을 보존하고자 조공을 바치고 한 것이다. 마치 조선이 중국 명이나 청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사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유지한 것과 같다.”는 견해도 있다.
관덕정(觀德亭)
건물 : 이중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짜리 단층 팔각지붕이다. 창호문 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자 형식으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나 일제 때 처마를 2척 이상 잘라버려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설명 : 관덕정은 1448년인 조선 후기 세종 30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군사 훈련을 위해 세운 곳이다. 이후 여러 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는데, ‘관덕’은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라는 <예기>의 글귀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 뜻은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것이다’이다. 이는 제주지방의 사림화를 위한 것이었다.
<탐라지> 「1653년(효종4)에 제주목사 이원진이 <동국여지승람> 및 <제주 풍토 록>을 참고하여 편찬한 제주도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읍지」에 의하면 창건한 후의 용도는 연무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으로 뿐만이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 또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탐라순력도>「조선 숙종때인 1702년에 병와 이형상이 제주목사 겸 병마 수군절제사에 부임하여 제주도내 각 고을을 순력 하면서 당시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과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을 제주목 소속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40폭의 채색그림으로 그리게 한 화첩」를 보면, 관덕정은 현재 복원 상태와는 달리 동쪽을 향한 관덕정 광장을 가운데 두고 북쪽과 남쪽에 건물이 나란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북쪽 건물은 ‘상아’라고 하며 제주 목사가 집무하는 곳이었다.
남쪽 건물은 ‘이아’라고 하여 판관이 집무하는 곳이었다. 조선 후기 제주는 형식상 전라도였으나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독자적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기에 제주 목사가 전라감사의 업무를 일부 대행하였고 목사는 군사 업무도 맡게 되었다. 때문에 목사 외에 추가로 판관을 파견하였다. 보편적으로 ‘이아’는 지방 사림의 권력기구인 향청을 뜻하지만 제주도의 경우 사림 세력이 강성하지 못했고 대신 목사의 보좌역인 판관이 주요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이아’는 중앙에서 파견된
서울 양반의 몫이었다.
관덕정 현판은 본래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그 현판은 불에 타 없어졌고 현재는 이산해「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송강 정철을 밀어내고 영의정이 되었던 사람」가 쓴 편한이 남아있다.
관덕정의 대들보 아래 창방 부분을 살펴보면 벽화가 있는데 제주도에서 발견되는 벽화로는 유일하며, 작자를 알 수는 없으나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워낙 흐릿하고 훼손되어 자세히 그림을 알아볼 수는 없다.
제주목 관아지
제주목 관아지는 탐라국 이래 제주의 최고 행정 관청이 모여있던 자리다.
발굴을 통해 유구 최하층에서부터 탐라시대, 통일신라, 교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인 문화층이 확인된다.
제주목 관아터는 최근 <탐라순력도>(1702년)와 <탐라방영총람>(1760년)을 활용하여 조선 후기의 모습을 복원하였다. 민관이 합심하여 복원한 이 제주목관아는 1999년 9월에 복원을 시작하여 2002년 12월에 복원을 완료하였다.
구조 : 이 터의 구성을 살펴보면 우선 연희각은,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상아의 동헌, 목사의 정아 등으로 불렸다. 이원조 목사의 '연희 각기'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도 누가 명명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라고 한 것은 외신이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41.33평이다.
또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 최해산 안무사가 창건하였다. 홍화각이라 명명한 것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 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훼철되었다. 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47.13평이다.
우련당은 1526년에 이수동 목사가 성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이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거나 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 목사는 개구리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영조 때에는 김 정 목사가 다시 정자를 중수하고 향의실이라 개명하여 공물을 봉진 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26.91평이다.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이었다. 창건년대는 확실하지 않고 1832년에 한응호 목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공제당(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본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32.58평이다.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 초익공 홑처마에 사모 지붕으로 면적은 2.72평이다.
외대문은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2층 누각 건물로 종루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여닫는다고 하며, 그 종은 묘련사의 옛 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외대문은 관아가 존속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대문이다.
기간 지주는 기를 달아두는 기구인 기간을 받치는 기둥이다. 이 기간 지주는 제주목 방어사의 황수기(黃帥旗)를 게양하는 깃대의 받침 기둥이었다.
중대문은 동헌으로 통하는 외대문과 내대문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복원되지 않은 건물들로는 망경루 등이 있는데, 망경루는 서울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으로 목민보다는 중앙 정계로의 복귀를 바랐던 제주 목사들의 심리상태를 보여주던 가장 큰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성지
제주읍성으로도 부르는 제주성지는 지방기념물 제 3호로 지정된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그 연대는 기록상으로 확실하지 않다. 1411년(태종 11) 제주읍성을 보수했을 때 성의 둘레가 4,700척, 높이 1척이었으나 1512년(중종 7) 증축으로 둘레 5,489척 높이 11척이 되었다.
이후에도 성안에 물이 없고, 가락천과 산 저 천(산짓물)의 범람으로 인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뤄졌다.
1565년(명종 20) 곽흘목사가 식수난과 변란 때의 물난리에 대비하여 동쪽 성을 산 지네 밖으로 물려 쌓고 동-서에 각 1문, 남쪽에는 2문을 내었다. 또한 1599(선조 32) 성 윤문 목사가 성 굽을 5자 더 늘려대고 남문을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고 남북의 두 수구(水口)에는 부지 개 모양으로 남수각과 북수각을 설치하였다.
이후 1780년(정조 4)에는 김영수 목사가 산 저 천의 범람으로 인가가 잠겨 부서지자 예성 터를 따라 길이 551보(步) 높이 9척인 간성(間城)을 쌓아 그 폐해를 막았다.
현재는 오현단 남쪽에 상지 일부가 복원돼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