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오랫동안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적 문화에 젖어 있으면서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주로 남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따라서 역사 속의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업적은 무시되었다. 최근에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고 역할이 다양해지면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역할을 통해서 업적을 남기거나 사회에 공헌을 한 여성들을 찾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 속의 여성이 존재감이 남성보다 현저히 부족하다는 인식이 있다. 이러한 필요성에 입각해 나는 여성인물인 김만덕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김만덕이 살았던 조선시대를 본다면 대부분의 조선시대 여성들은 출산과 자녀양육을 비롯하여 가족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한편, 농업노동, 직조 노동, 행상 등 여러 생산 활동에도 종사하였다.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는 여성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조선 후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여성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까지 알려지는 사람은 김만덕 외에 별로 없다. 이처럼 여성이 상업 활동을 통해 성공한 사례는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럼 김만덕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위해 나눔과 상생정신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최근에는 김만덕 객주터 2015년 4월에 복원되었으며 제주시 건입동 동사무소 동쪽 일대 객주터 2146㎡에 만덕 고가 3동, 창고 1동, 객관(여관) 2동, 주막 1동 등 당시 건물과 거리 등을 재현했다.
가 문을 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김만덕의 정신을 잇는 사업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 글은 김만덕의 생애를 문헌을 중심으로 고찰하고 다시 재조명하면서 그녀의 업적을 대새기고자 한다. 신분사회, 남성 중심 사회를 살았던 조선시대 여성 김만덕의 삶에 대한 진취성과 주체성을 새겨보는데 의의가 있다.
김만덕 생애 요약
김만덕의 신분환원과 상업활동
김만덕에 관한 행적을 관한 자료는 정소 실록(손조 6년, 1805년 8월 간행), 채제공의 번압집(순조 24년, 1824년 이후 편찬), 이가환의 시, 김정희의 은광연세, 만덕의 비문, 정약용의 ‘다산 사문 집’등이 있다. 이 중에서 지금까지 김만덕(1739~1812)에 관한 행적을 인정한 공식적인 기록 중 역사적으로 입증된 구체적 사실은 채제공(蔡濟恭) 1720(숙종 46)∼1799(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의 번암 집(김만덕 전)이라 할 수 있다. 채제공의 번암 집에 근거하여 생애사를 중요한 사건을 기준으로 요약하였다.
김만덕이 활동한 18세기 후반은 정조시대로, 상업이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였다.
김만덕은 보부상 중심으로 전국유통망이 갖추어가던 시대변화를 포착하고 포구가 지닌 교통과 유통의 중심지라는 가치에 주목해 양인 신분을 회복하자 산지천 동쪽 금산 기슭에 객주 객주는 숙박업 역할과 외지 상인들의 물건을 위탁받아 팔거나 거간하는 매매 중개상 역할을 했다.
를 차렸다. 김만덕은 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양반 계층을 표적시장으로 설정해 제주의 특산물인 말총, 미역, 전복, 표고버섯, 양태, 우황, 약초, 녹용, 귤 등을 육지 상인들에게 공급하였으며,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육지의 옷감이나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아 많은 시세차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포구에 적극적으로 선상을 유치했고, 자신의 창고와 선박까지 소유하게 되었다. 관가의 물품도 조달하게 되었고, 선상들의 물품을 독점적으로 거래하는 여객 주인권이나 포구의 상품 유통을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포구 주인권을 획득한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선반을 이용한 해운업에 이르기까지 포구의 전 상권을 장악하며 부를 축적해 갈 수 있었다. 또한 상품 거래를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금 제공 등의 금융업, 그리고 창고업까지 확대해 나가는 사업다각화 전략을 구사하면서 기업을 키워나갔다. 근면 절약과 철저한 신용으로 재물과 사람을 모으고 기반을 다져 제주의 상권과 육지 상인과의 거래까지 장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0년도 채 되지 않아 제주의 거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사료와 같다.
만덕은 성이 김씨이며, 탐라(제주)의 양인 집안의 딸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의지할 바가 없어 기녀를 의탁하여 살았는데, 점차 성장하자 관부(官府)에서는 만덕의 이름을 기안(妓案)에 올렸다. 만덕은 비록 순종적으로 기녀의 역을 행하였지만, 스스로 기녀로 대접하지는 않았다. 나이 스무 살에 그 사정을 관아에 읍소하니, 관에서 그것을 불쌍히 여겨 기안에서 제외하고 양민으로 복귀하였다. 만덕은 비록 집안에 고용된 노와 거주했으나, 탐라의 남자를 남편으로는 맞이하지 않았다. 그 재주는 재산을 늘리는 데에 뛰어났다. 때에 따라 물가의 높고 낮음에 능하여, 팔거나 샀다.
수 십년에 이르러 자못 명성을 쌓았다. 蔡濟恭,『樊巖集』,55권 <萬德傳> “萬德者。姓金。耽羅良家女也。幼失母無所歸依。托妓女爲生。稍長。官府籍萬德名妓案。萬德雖屈首妓於役。其自待不以妓也。年二十餘。以其情泣訴於官。官矜之除妓案。復歸之良。萬德雖家居乎庸奴。耽羅丈夫不迎夫。其才長於殖貨。能時物之貴賤。以廢以居。至數十年。頗以積著名”
김만덕의 빈민구제와 금강산 구경
정조 16년(1792년)부터 정조 19년(1795년)까지 제주도에는 4년 동안 흉년이 계속되어 아사자가 17,963명이나 발생하였다. 조정에서는 정조 19년 2월에 제주도민을 구휼하기 위해 구호곡물 1만 1천 석을 보내지만, 수송선단 중 5척이 침몰하면서 제주도민은 아사자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김만덕은 자신의 전재산 (돈 1 천금) 출연하여 500여 석을 사 오게 해 관에 진휼 미로 내놓아 백성을 구휼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사료와 같다.
성상(정조) 19년 을묘(1795년)에 탐라에 큰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시신이 침상을 이루었다. 왕이 곡식을 배에 싣고 가서 구제하기를 명했다. 바닷길 800리에 바람 편에 오가는 것이 베짜는 북과 같았으나 오히려 때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만덕이 천금을 희사(喜捨)하여 쌀을 사들였다. 육지의 여러 군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자 만덕은 십 분의 일을 취하여 친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수송하였다. 부황 난 자가 듣고 관가 뜰에 모여들기가 구름과 같았다. 蔡濟恭,『樊巖集』,55권 <萬德傳> “於是萬德捐千金貿米。陸地諸郡縣棹夫以時至。萬德取十之一。以活親族。其餘盡輸之官。浮黃者聞之。集官庭如雲。官劑其緩急。分與之有差。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咸以爲活我者萬德”
정조는 김만덕의 덕행을 치하하고자 제주목사를 통해 김만덕의 소원을 물었다. 김만덕의 소원은 서울에 가서 임금님이 계신 궁궐을 우러러보고 천하명상인 금감산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 여인들은 1692년 제정된 월해 금법(越海禁法) 척박한 토양과 바다 생활로 남자들의 생존율이 낮자 국가에서 부역의 의무를 여성들에게 전가시키기 위해 만든 법이다.
으로 출육이 금지되어 있어 한양과 금강산을 감상하고 육지를 구경하는 것도 불가능한 때였다. 정조는 말을 하사하고 그녀의 여행 편의를 돕도록 했으며 의녀반수에 명해 공을 기렸다. 이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사료와 같다.
제주(濟州)의 기생 만덕(萬德)이 재물을 풀어서 굶주리는 백성들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상을 주려고 하자, 만덕은 사양하면서 바다를 건너 상경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기를 원하였다. 허락해 주고 나서 연로의 고을들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 濟州妓萬德, 散施貨財, 賑活饑民, 牧使啓聞。 將施賞, 萬德辭, 願涉海上京, 轉見金剛山, 許之, 使沿邑給糧
김만덕의 삶에 대한 가치관과 실천 모습
김만덕의 주체적인 삶의 태도이다. 김만덕의 주체적인 삶의 모습은 먼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그 당시에 천민이였던 신문을 뛰어넘어 양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나타난다.
둘째로,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던 조선시대에 자신이 의지로 바로 상인이 되어, 돈을 벌었다.
돈을 버는 상인은 천한 것으로 생각했던 조선시대에 자신이 뜻한 바를 위해 스스로 상인이 되고자했던 점은 김만덕이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삶을 살았다는 증거이다. 직업인으로서 충실하게 살아서 결국 거상이 되어 목표한 바를 이뤄낸 모습에서 또한 주체성이 엿보인다.
셋째로, 제주 여인들은 예로부터 갖은 고난을 남자와 함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공동으로 부담하며 인내심이 강하고 활발하여 경제활동과 생활력이 강했다. 김만덕 또한 출국 금지령이 실시되던 제주라는 특수한 지역에서 자신을 가두는 체계를 부정하고 극복해 나가는 태도를 보였다.
나눔과 상생의 정신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어려운 상황에 처할수록 서로 돕고 보살피는 환난상휼의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해나갔다.
김만덕은 평생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이다. 그녀는 조선 정조 때의 어려움에 처한 이웃들을 위해 나눔과 상생정신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귀감이 되고 있는 대표적 인물이다.
김만덕이 여러 부자들 중 추대가 기리는 위대한 인물이 된데는 그녀가 실천함 베풂과 나눔이 있었다.
김만덕은 자신의 사업을 경영하는데 있어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이익은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박리다매(薄利多賣), 둘째는 적정한 가격으로 판매해서 원망을 사지 않는 정가매매(正價賣買), 정직함이 우선이라는 신용 본위(信用本位)다. 여성의 몸으로 남성들도 하기 힘든 상업에서 큰 성공을 이룬 것은 그녀의 이런 원칙 덕분이었다. 이 원칙들은 단지 부를 축적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당장의 눈앞에 이익에 급급하지 않고 상도를 지킨 경영철학이자 상생의 정신이다.
도전과 개척정신
김만덕은 여성과 기녀라는 성과 신분, 제주라는 지리적 한계와 신분의 틀에 얽메이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김만덕은 기녀로부터 양인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조선시대의 신분사회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어 신분을 바꾼다는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던 체계였다. 이 때문에 김만덕이 기생이라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양인으로 다시 신분을 바꾼 일은 역사적으로 획기적이고 파격적인 행보였다.
었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활발해진 해상을 이용한 유통업에 눈을 떠 여성기업인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갔던 창의적인 개척자였다. 아무리 불리한 여건도 그것을 박차고 일어서려는 불굴의 정신 앞에서는 장애가 될 수 없음을 김만덕은 일생을 통해 증명했다.
이를 통해 임금을 비롯하여 체제공, 후에 추사 김정희 등 남성 사대부의 칭송을 받기에 이른다. 추사 김정희는 그녀를 은혜로운 빛이라 칭하며 편액에 '恩光衍世'(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퍼지다) 글을 적었다.
결론
김만덕은 전통사회에서 가난한 가정의 딸로 태어나 일찍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어린 나이 때부터 전통사회가 규정한 천대받는 여성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생존하고 또 성공하였다. 그러나 유교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에 반했던 자신의 성공이 주는 명성과 안일한 행복에 대한 집착을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 버리는 결단을 내렸다.
만덕은 세상의 흐름을 꿰뚫는 안목을 가지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사업을 구상하였고 육지 상인과 제주도민과 더불어 이익을 나누는 철학으로 사업에 성공하였다.
만덕 자신은 검소하게 생활했으나 가족과 이웃과 더불어 사는 넉넉한 마음을 지녀 자신이 아껴 모은 재산을 기꺼이 사회에 환원하여 제주도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일반 백성과 왕실로부터 칭송을 들었고 조정의 유교 선비들로부터 흠모와 존경을 받음으로써 변방이었던 제주도의 주변적인 여성이었던 만덕은 여성 최고의 벼슬에 오르고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제주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경계를 뛰어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기녀라는 한계를 그녀의 사업을 위한 유리한 자원으로 되바꿔 활용하는 지혜를 그녀는 갖고 있었다. 만덕은 여성인 자신을 옥죄었던 가족과 시대와 불화하거나 등 돌리지 않고 현명하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면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진정한 승리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녀의 삶은 김만덕의 삶은 그 자체로 변화와 모험, 도전으로 대표된다. 그녀 자신이 제주를 기반으로 부를 이루었고 앞으로도 그녀의 터전은 제주가 될 것이기에 제주도의 불행은 곧 그녀의 불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만덕의 삶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 굶어 죽어가는 제주도민들 살린 행동이다. 기부를 통해서 그녀는 신분, 성별, 제주, 상인이라는 모든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단순히 부만 이룬 여성이었다면 오늘날 김만덕이란 이름은 우리 앞에 없었을 것이다.
김만덕을 조상으로 둔 것은 제주도민들에게 가장 큰 자랑이고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귀감이 아닐 수 없다.